파면은 당연지사지만, 문형배 헌재소장이 선고 요지를 읽기 직전 십여 초 침묵이 솔직히 상당히 긴장되었다. 그놈의 ‘혹시나’라는 알 수 없는 마음에. 그러나 역시 재판관들 전원일치로 윤석열의 비상계엄 행위에 대하여 냉정하고 엄중히 판단하고 비판하며 파면을 선고했다.
비상계엄 난동을 막아낸 시민들과 국회의원들, 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파면 선고한 헌재 재판관들,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진실을 찾아내고 싸운 언론인들, 정치인들 모두 요즘 유행한다는 드라마 제목을 빌려 표현하면 ‘폭삭 속았수다’. 제주도 사투리로 ‘속다’라는 말은 오해하고 속았다는 뜻이 아니고, ‘정말 애쓰다’, ‘너무 고생하다’라는 뜻이다. 누군가 힘든 일을 마치고 애쓴 다음에는 ‘속았수다게’ ‘속았져’ ‘속았수다 마슴’ 하고 말하니까.
나는 박근혜 탄핵 국면 때는 열너댓 번 집회에 나가서 촛불 하나 다 탈 때까지 행진하고 집에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생한 수많은 시민들에게는 미안하게도 딱 세 번 나갔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 통과할 때 한 번, 그리고 탄핵심판 변론 거의 끝날 때쯤 헌재의 파면 선고에 힘 싣는 차원에서 두 번. 윤석열의 너무나 뚜렷한 반역 행위는 파면 사유가 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데다가, 솔직히 나이가 좀 들면서 예전보다 추위를 좀 타게 되고, 집을 자주 비우기가 좀 힘든 사정도 있어서. 정말 은박지로 몸을 둘러싸고 체온을 보존하면서까지 거리에서 밤을 새운 시민들이 대단하고, 비상계엄 당일에 국회로 달려간 모든 이들도 참 대단했다.
헌법재판관들도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것이다. 표현을 안 할 뿐이지 굉장히 피로했을 것이다. 극우적 탄핵 반대론자들의 극렬 선동에 놀아난 법원 폭력 사태를 목격하면서, 재판관들을 특정해서 집앞까지 가서 시위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이념 성향 단정과 가짜 뉴스 공격, 막판 선고 기일 지정을 두고 언론과 논평가들이 주 단위, 2-3일 단위로 시간을 쪼개가며 온갖 예측과 억측을 내놓으면서 정신적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역시 한국 민주주의의 지난하고 피어린 역사의 무게를 재판관들이 받들었기에 다행이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발표하던 밤에 나는 오랜만에 방안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가 뭐라고 자꾸 텔레비전에 나와서 길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아… 이거 또 뭐라고 주절거리나’ 싶어 인터넷을 확인했다. “비상계엄 선포”라는 속보를 보고서 순간 전율감이 왔다. 참, 어이도 없었고. 새벽 3시까지 텔레비전을 보며 군인들이 혹시 총이라도 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을 응원하며 속으로 기도문을 계속 외우지 않았겠나.
윤석열은 자기만의 시간과 불안에 갇혀 대통령 권력을 마구 휘둘렀지만, 이 어그러진 시간을 온 나라 시민들과 법률인들, 정치인과 양식 있는 언론인들이 역사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시 바로잡았다. 정말 윤석열은 무슨 생각으로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섰을까? 그의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정도를 넘어선 한 국가의 민주주의와 역사에 대한 반역 행위였다.
헌법재판관들의 파면 선고가 끝난 지금, 요즘 종종 떠올렸던 문구가 명언인 듯하여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한 대목을 되새겨 본다:
무릇 역사가란 사실에 정확을 기하고 그 진실을 잡아내며 어떠한 사사로운 감정에도 사로잡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 흥미니 공포니 증오니 애정이니 하는 감정 때문에 진리의 길에서 빗나가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야말로 진리의 어머니가 아닌가! 역사는 시간의 경쟁자이고 모든 행위를 저장하는 창고이며,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의 모범이며, 훌륭한 교훈인 동시에 앞날을 위한 경고여야 하는 것이다.
– 『돈끼호떼』, 미겔 데 세르반떼스 / 김현창 옮김, 동서문화사, p. 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