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집회와 예식보다 40일간의 참회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예수도 하늘의 뜻을 실천하기 전에 스파르타식 고행을 거쳤다. 40일간 광야에서 단식과 고행을 하면서 악마의 유혹과 속삭임을 패배시켰다. 그런 다음 제자들을 규합하고 당대 민중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직접 하느님나라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몸소 살다가 갔다.

비록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자기 동족 유대인의 고발로, 기득권 층의 눈에 거슬려 정치범으로 누명 쓰고 십자가 형으로 사형당했지만, 죽고 나서 마침내 부활했다. 그 사건이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으로 길이 보존되고 실천되는 것 아니겠는가?

진짜 스승 예수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당대의 유력한 에세네파 지도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베풀었다.

기독교도들은 지금이 이른바 사순절(四旬節)이라는, 예수의 광야 훈련 40일의 시간을 몸소 실천할 때가 아닐까?

집회와 예식(개신교 예배, 가톨릭 미사)에서 벗어나 양심성찰과 자기 각성의 훈련의 시간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다음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제자들더러 전파하라고 할 때, 제자들더러 세상 곳곳에 흩어지라고 했지, 모여서 헌금 바치고 찬송가 열창하라고 한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종교 예식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본말을 바로 세워서 교회의 존재 이유를 증거할 토대를 다시 세워야 하지 않을까?

또한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 채우면서, 부족함 없이 살았던 바로 그 시절을 직접 다시 살아가는 모습으로 재생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짜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가 아닐까?

교회 건물, 화려하고 고상한 예배, 열정적인 찬송가, 헌금 바치기, 그런 것에 대해 지금 시점에서 과연 기독교의 최고 존재자는 높은 곳에서 어떻게 보고 있을까?

요즘 생각나는 기독교 윤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의 황금률이란 것: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해주어라. 베풀어라.”

이것은 <<논어>>의 공자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다만 공자는 부정 어법으로 말할 뿐이다.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시키지 말아라.”

성서의 어떤 문구: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거든 먼저 원한이 있는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그 예물을 바쳐라.”
종교적 의례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연대하는 것이고, 그러한 실천이 없는 믿음은 하느님도 반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종교 집회가 멈춘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실은 기독교를 비롯한 기성 종교들이 적어도 몸소 회개와 반성을 실천하여 스스로를 변형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아닐까?

종교의 자유라는 공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존재 이유, 예수의 40일간에 걸친 사막과 광야의
훈련의 시간 사순절을 보냄이 어떨는지.

[2020.03.09,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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