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사태의 흐름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이 드는 경우가 있다. 이번 이재용 구속 영장이 기각된 것이 바로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서 특검이 이재용의 430억원 뇌물 혐의를 반박하기 힘든 수준으로 치밀하게 밝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연금 합병 찬성이 먼저냐, 최순실-정유라-장시호-미르재단, K재단 대가 제공이 먼저냐 그 시간적 선후 관계는 대가성을 부인할 만한 근거로는 박약하다고 생각했다. 이재용의 430억은 이미 약속된 부당 이익(국민연금 합병 찬성에 따른 삼성그룹 승계 구조 지원)에 대한 사후 이행일 수밖에 없다.
2015년 7월 25일 박근혜 독대 이전부터 삼성이 최순실-정유라를 지원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보도도 보았고, 독대하면서 박근혜가 질책했다는 부분은 한마디로 왜 약속을 제때 확실히 만족할 만큼 ‘삼성답게’ 이행하지 않느냐는 입금 독촉이라고 봤다. 그리고 미르-K재단 출연금이란 것을 그냥 청와대에 뜯겼다는 주장은 그야말로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청와대에서 요구를 한다고 해서, 지금 시대에 기업 회장단들이 무턱대고 아무런 직접적 또는 간접적 반대 급부 없이 770여 억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출연할 생리를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 뻔하다.
박근혜 독대를 전후로 가장 큰 규모로 나서서 돈을 갖다 바치고, 최순실 일당을 지원하기 위해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진행한 대가성 뇌물 공여 행위의 목적은 당연히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을 정점으로 한 박근혜 임기 내 지배구조 완결이 아니었겠는가.
이번 ‘역사적 특검’이 출범한 목적은 기존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미진했던 박근혜-최순실 집단 범죄의 실체를 제대로 규명하기 위한 것인데, 이것을 기소 법정의 판사도 아닌 영장 전담 판사가 숱한 날을 거쳐 밤을 새워 밝혀낸 특검 수사 결과를 18시간 고민한 다음 ‘법률적 다툼의 소지가 있고 소명이 더 확실해야 한다’는 몇 마디로, 내용으로는 허탈하고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기각해버렸다. 삼성 재벌의 막강한 재력에 눌린 조의연 영장 전담 판사의 말 한마디로, 추운 겨울 거리에서 손을 불어가며 절실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 초조하게 언론 보도를 지켜보던 민주 시민의 여망은 배반당했다.
부디 특검의 입장 발표대로 흔들림 없는 철저하고 물러섬 없는 수사가 이루어지고, 그 밖의 중대 범죄들에 대해서도 수사 기간을 반드시 연장하여, 민주공화국의 정체에 대한 치욕과 짓밟힌 국민들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소명을 이행하기를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2017.01.19, 2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