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許生傳)]은 걸출한 소설이다. 남산 자락 아래 허름한 두어 칸 초가집에서 오로지 글만 읽으며 삯바느질 하는 아내에게 생계를 떠미룬 허생. ‘도둑놈 심보’라며 앙탈을 부리는 아내의 성화에 모욕감을 느낀 그는 마침내 책상을 물리치고 돈벌이에 나서서 최고의 장사꾼이 된다.
한양의 거부 변모(卞某)는 낯모를 선비가 찾아와 장사 밑천으로 당당하게 일만 냥을 내달라고 요구하는 심상찮은 상황을 맞지만, 허생의 양심을 담보로 돈을 내준다. 그 돈으로 허생은 과일 독점상을 하여 십만 냥을, 또 그것을 밑천으로 망건 재료인 제주도 말총 독점상을 해서 백만 냥을 쓸어 모은다.
이 막대한 돈을 쓰기가 난감해지자 고민 끝에 허생은 뱃사공에게 물어 한 무인도에 정착한다. 마침 관가의 위협을 피해 숨어 사는 도적 떼를 찾아가 돈을 풀어놓는다. 반신반의하던 도적들은 허생의 놀라운 수단과 거침없는 지도력에 감탄하고 마침내 무인도로 이주해서 이상 세계를 이루어 산다. 오십만 냥을 바다에 내던지고 섬을 떠나면서 허생이 도적들에게 남긴 것은 문서로 된 책이나 법령이 아니라 짤막한 교훈이었다. “아이가 나거든 수저를 반드시 오른손으로 들도록 가르치고 하루라도 먼저 난 사람에게는 음식을 먼저 먹게 하여라.”
5년 만에 한양에 돌아온 허생은 변모에게 빌려간 일만 냥의 빚을 십만 냥으로 되돌려준다. 충격을 받은 변모는 도대체 허생의 정체를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었으니, 미행 끝에 허생의 이웃이 알려준 남루했던 그 선비의 삶과 마누라의 고생을 알고는 혼란을 느낀다. 남산의 초가집으로 들어선 변모는 돈을 들고 가지만 오히려 허생의 장사 철학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감복했으니, 돈의 이윤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소인의 상술이요 망국적인 상술이라는 것. 장사도 도덕적 각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변모는 당대의 권신 이완을 허생에게 소개한다. 오로지 권세와 금력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변모와 이완은 그러나 태연하게 술잔만 기울이고 반응은 무덤덤한 허생 앞에서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한다.
허생은 이완에게 세 가지 조언을 한다. ‘나라의 충신이라면 임금으로 하여금 삼고초려할 만한 와룡 선생을 소개할 테니 주선해 보라.’ 이완은 어렵다 한다. ‘더 좋은 일이 있으니 조선에 대한 옛 기억만 갖고 있는 명나라 장사들에게 여인들을 시집보내도록 조정에 특청해라.’ 역시 어렵다 한다. ‘아주 쉬운 일을 가르쳐줄 테니, 청나라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있는 만큼 사대부 자제들을 뽑아 유학을 보내면 그들의 풍속과 실정을 파악함으로써 장차 나라의 장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완은 말한다. “도덕 옛 법에 존엄한 사대부들이 자기의 귀여운 자제들을 오랑캐들의 풍속에 젖게 하겠소이까?”
허생의 답변. “한 줌도 못 되는 좁은 땅에서 어느 뼈인지도 모르게 태어나서 사대부라고 뽐내는 그놈들이 그래 상투나 틀고 도포나 입으면 사대부란 얘긴가. 그놈의 도덕이나 예법은 무엇이나 못 한다는 것뿐이니, 그놈들의 예법을 상대로 무엇을 하겠는가. 우선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못 하겠다면서 신신(信臣)을 자부하는 네 놈부터 목을 잘라야겠다!” 허생은 칼을 뽑아 배려 든다.
삼고초려 유비를 흉내 낸 이완은 다음날 허생을 찾아갔지만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었다.
허생은 몸소 돈을 쓸어 모았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린 장사꾼의 생리를 간파했고 권신과 스폰서 간의 동맹을 지탱하는 무지와 위선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둘 다 나가 떨어진 셈이다.
박지원은 18세기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돈과 권력자가 내세우는 도덕과 예법의 진상을 드러냈다. 더구나 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거처에서 아내에게 멸시를 당한 허생의 자의식, 능수능란한 거부 변모와 출세의 탄탄대로를 달리던 야심찬 세력가 이완의 허술한 세계관과 심리를 묘사한 문장들은, 어지러운 말의 미학에 몰두하는 현대 작가들의 글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고 생생하다. 남산 자락 밑 살구나무가 서 있던 허생의 초가집은 사라지고 없지만 말이다.
[2012.05.29, 2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