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는 ‘텀블링’이냐? 무시하고 일부러 ‘덤블링’이라고 쓰마. 지금으로부터 7년여 전, 아니 몇 년 전인지는 정확하지 않다만, 동네 놀이터에서 덤블링, 이른바 공중제비를 돌던 긴 머리 소녀가 떠오른다. 어리디 어린 것이 어디서 배운 재주인지 뒤로 갑자기 한 바퀴 솟구치더니 친구들 앞에서 재주를 뽐내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뭐라고 재잘대는 것이 아닌가. 덤블링 소녀가 한바퀴 뒤로 돌 때 놀이터에 깔린 모래도 솟구쳐 올랐다. 마치 작은 구미호 한 마리를 보는 듯했다.
그 장면을 보고 난 놀라기도 했지만 그런 ‘야성’을 갖춘 아이랑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물론 그 장면 속에만 살아 있는 아이일뿐 지금쯤 그 아이는 뭘 하고 있는지, 이사를 갔는지는 모르겠다. 공중제비와 함께 아이의 손목에 옷에 묻어났을 그 모래밭도 지금은 없다. 놀이터는 우레탄 바닥 위로 플라스틱 놀이기구와 가뭄에 콩나듯 아이들이 타는 그네와 미끄럼틀, 시소가 있는, 영하 10도 이하를 밑도는 이상 제트기류 현상 속의 겨울 날씨 속에서 조금 썰렁한 곳이 되었다.
요즘 덤블링 할 줄 아는 아이들은 몇이나 되는 것일까? 나도 한때는 옆돌기 정도는 다소 화려하게 할 줄 알았고, 씨름을 하다가 단짝 친구를 집어던지는 바람에 팔에 금이 가게 만든 적도 있었다. 내 몸에서 어떤 힘의 역학 관계가 그런 현상을 낳았는지는 지금도 미스테리다.
어쨌든 세상은 풍요로운가? 정교하게 분할된 시공간 속에서 리얼타임으로 무엇이든 들이대라는 세계. 이 세계에 얼음땡은 사라졌고, 땅따먹기도 사라졌고, 다방구도 사라졌다. 운동장에 삼각형을 그려 구슬을 모아넣고 외눈으로 조준하여 빼갈을 때리던 그때 그 시절은 오지 않는다. 뒷동산으로 김밥을 말아 동네 친구, 형, 누나들이랑 소풍가던 시절도 옛말이 되어간다. 도시에서도 예전엔 가능했던 이야기다.
오늘밤, 공중제비를 돌던 작은 구미호를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런 바람직한 아이들이 판치고 돌아다니는 세상을 꿈꿔본다.
[2012.02.25, 2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