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화 감각

역설적이지만 눈앞에서 보란 듯이 벌어진 일이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은 흔히 익숙해진 법칙이나 규제력을 벗어나 충격을 준다. 예를 들면 쓰나미나 대지진 또는 기상 이변, 또 9·11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참사는 왜 충격과 공포를 일으키면서도 시간이 흐르면 그 당시의 강도만큼 다시 떠오르지 않고 그 스케일만 남는 것일까?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미디어를 통해서만 전해지는 간접 체험이기 때문인가? 그런데 그 영향력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다. 자원과 기술 동원 방식에 변화를 가져오고 한 국가의 대내외 정책과 사회 시스템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물론 변화의 깊이와 폭과 속도는 느리다. 그리고 경험한 자와 전해 들은 자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인다. 마침내 세상에 정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는 조금씩 희미해진다.

자꾸 안 쓰고 피하고 미루면 정말로 못하게 되는 것이 있듯이, 규제와 법칙을 따르는 데만 익숙해진 인간은 그 규제와 법칙을 상대화하는 감각이 퇴화할 수밖에 없겠지.

“여러분, 이런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위, 즉 제멋대로의 변덕이야말로 우리 같은 인간에겐 이 지상의 무엇보다도 가장 귀중하고 유익한 것일는지 모른다.…… 우리의 건전한 이성의 결론에 모순되는 경우에라도, 그것은 온갖 이익을 한데 묶는 것보다 더욱 유익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것, 즉 우리의 인격과 개성을 보존해주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인간을 낡은 습관에서 해방시켜 과학과 상식의 요구대로 인간의 의지를 고쳐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을 그런 식으로 개조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들은 어떻게 알았는가? 인간의 의욕을 꼭 교정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어디서 얻었는가? 다시 말해서, 그런 교정이 실제로 인간에게 이익을 초래하리라는 걸 당신들은 어떻게 알았는가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이것은 규칙에 따라 삶을 체계화하려는 공리주의적 발상에 대한 도스토예스프스키의 반박이다. 규칙에 압도된 삶은 숨이 막혀버리고, 여기에서 끓는 냄비의 뚜껑을 눌러놓으면 뜨거운 수증기가 솟구치듯이 그 규칙을 상대화하는 힘이 튀어 오른다. 그럼 이 솟구치는 힘을 계속 눌러놓겠다면? 억압이 공상을 낳고 공상은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묘한 힘을 얻는다. 기계적 필연 속에 갇힌 인간은 공상 속에서 현실의 최대치를 길어내며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규칙을 상대화하는 감각은 규칙에 적응해 습관을 형성하는 능력의 반대편에 있는 본능이고, 그것은 어떤 때는 윤리적이기조차 하다. 그래서 ‘감각적’이란 말의 뜻도 어떤 맥락에서는 다른 내용을 갖게 되는 것이다.

[2012.02.17,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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