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슬럼프(Global Slump)』(데이비드 맥낼리 지음/강수돌·김낙중 역, 2011, 그린비)

미디어 홍수, 정보 홍수 시대에 책이라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형식의 매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물론 시장에서 화폐로 교환되고 소비되는 문화 상품이라는 관점에서는 책을 위한 책, 글을 위한 글이라 해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수도 있겠다. 문자와 이미지의 소비 자체만으로도 독자는 흐뭇해할 것이고 그렇게 소비하는 상품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하나의 의식이 자리를 튼다. 시대의 지적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있다는 일종의 최면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갈수록 메말라가고 현실을 꿰뚫어보는 눈초리는 무디어지는 아이러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21세기 지식 문화의 자화상은 아닐는지.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은행의 파산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와 미래를 말하는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불안해진 투자자, 소상공인, 서민들 가운데 경제 분석에 필요한 지식을 쌓는 게 유행처럼 되었다. 미국과 유럽 연합의 막대한 구제금융 조치로 지난 3년간 위기는 봉합되는 것 같았고 한국 사회에서는 ‘복지국가’가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이제 ‘위기론’을 반복하거나 그 분석에 몰두하는 것은 다소 성가시고 맥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뭔가 해소되지 않은 불안감은 일상을 더욱 괴롭히고 있다. 일자리 구하기는 계속 어려워만지고 장바구니 물가는 부담스럽기만 하고 각종 공공요금과 교육·의료비 부담도 늘어간다. 과연 위기의 본질은 무엇이었고 그 많은 경제 분석론들을 통해 얻어낸 교훈들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저자 데이비드  맥낼리(캐나다 요크 대학교 정치학 교수이자 사회운동가)는 바로 이 물음을 놓고 2008년 이후의 신자유주의 위기를 역사적 구조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끌어내고 있다.

대체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흔들리는 원인을 진단할 때, 주류의 의견은 비대해진 금융시장이 키워놓은 막대한 부채의 규모를 감당할 능력이 부재하다는 데 비중을 두어왔다. 그런데 왜 금융 과잉 체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는지, 또한 과잉된 금융시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은행과 정부와 기업은 어떤 생존 경로를 택해왔으며 그 경로의 위기가 심화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면, 192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침체와 성장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달러의 가치가 금의 가격에 고정되어 있던 브레턴우즈 체제는 1971년 이후 무너졌고 외환거래 시장과 파생금융 상품이 크게 발달하게 되고 기업들은 여기서 형성된 막대한 자본을 끌어다가 해외로 생산 기지를 이전했다. 또한 강도 높은 노동 규율과 과잉 투자로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하지만, 자본의 이윤율은 하락해왔다. 노동 소득이 감소하고 고용이 불안해지면서 주택 융자금을 상환할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데다가 각종 은행들은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최신 금융 공학을 동원하여 채무 관계가 모호해진 파생금융 상품을 더욱 남발하게 된 것이다. 즉 노동 소득의 실질적 감소와 고용 불안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과잉 투자와 생산이 이루어진 결과 자본의 이윤율은 감소했고, 이를 보전하기 위해서 비정상적인 금융 행위가 온갖 법률과 정부 정책으로 더욱 키워진 데서 현재의 위기가 온 것이다.

이 위기의 고통은 인종과 계급의 일방적인 서열에 따라 아래로 이전되어가고 있다. 대출 이자와 수수료에 시달리는 빈곤 계층, 유색 인종, 다국적 기업에 고용된 동아시아의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과 순응 유도 전략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체제의 ‘새로운 규율과 도덕’을 확립하겠다는 것이 현 위기를 돌파하려는 지배 계층의 전략이다.

‘글로벌 슬럼프’는 규율과 차별로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을 재편하려는 신자유주의 전략에 맞서 새로운 대안적 저항 윤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시대적 경향성을 대표하는 용어이다. 그 저항의 사례들은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멕시코의 오아하카에서, 유럽의 그리스에서, 또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둔 풀뿌리 지역운동, 특히 노동조합과 지역 사회의 연대에 힘입은 ‘자치 공간’을 확보한 경험에서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매력을 이미 상실해가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짜 도덕’은 순진하고 허술한 금융 공학 이론(물리·수학과 시간에 대한 단선적 이해에 기초한 금융 예측 기술)을 뒷받침하기 위한 불안 심리의 표출이었음이 점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저자 맥낼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 같다. 향후 10년 동안 지금의 위기, 곧 글로벌 슬럼프가 어느 방향으로 귀결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의 위기-공황-회복-성장 주기는 시간의 기계적 연속성을 따르지 않으며 파국을 막기 위해선 창조적이고 과감한 실천을 통해 그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는 단절의 국면을 창출해야 한다고. 10년이 지나 더불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자기 점검’의 자료가 될 만한 책이다.

[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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