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호 감독이 1983년에 내보낸 영화 <바보 선언>을 인터넷으로 보았다. 기대한 만큼의 충격은 없었지만, 1980년대의 사회상 한 편을 영상으로 담아내면서, 대사가 거의 없이 어린이의 멘트로 지속되는 전개도 색다르고 잔잔했다. 떠돌이 절름발이 동철(김명곤)과 택시 기사 육덕(이희성), 가짜 여대생이자 몸 파는 여인 혜영(이보희)의 참신한 연기를 보는 게 흥미진진했다.
혜영 주변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 헤매면서 혜영을 떠나지 못하고, 결국 상류계층의 동물적 욕망에 희생당한 그녀의 죽음을 곡하는 동철의 사랑과 울분, 그리고 점점 동화되어가는 육덕의 마지막 장면은 조금 짠했다.
5공 시절 탄압받던 영화계의 문제 감독 이장호가 검열을 통과하고자 20여 개의 제목을 준비해두었다가 결국 <바보 선언>으로 채택되었고 1년 넘게 창고에 썩었던 필름이 개봉되어 반향을 얻었다는 이 영화. 이보희라는 여배우가 난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무릎과 무릎 사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접시꽃 당신>, <어우동> 등 한때를 휘어잡던 그때가 나는 초등~중딩이었는데도, 거참 묘한 매력의 여배우였다. 그런데 전문적인 연기파 여배우로서 자기 길을 계속 갔더라면 영화사에 크게 발자취를 남길 배우가 아니었을까? 좀 막연하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든다. 한때 이장호 감독이 아니면 이보희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었다고 한다.
얼마 전 자 취방에서 숨진 최고은 작가의 생애를 잘은 모르지만, 80년대에 활동을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도 해보게 된다. 배고파도 제작사와 영화 제작 시스템의 횡포에 희생당하지 않으면서 그래도 서로 동고동락하는 기쁨이라도 느끼면서 찌개에 밥이랑 소주랑 먹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면서 또 내일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나만의 공상인가?
[201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