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하는 힘

회고하는 것이 힘을 불러일으킨다는 믿음을 루쉰(魯迅)의 소설 <고향>을 읽고 나서 가져본다.

20여 년의 방랑 생활 끝에 모처럼 찾은 고향은 생각처럼 정겹고 활기찬 곳이 아니었다. 어린시절 새를 잡고, 조개를 줍고, 수박밭에서 오소리 사냥을 하는 법을 가르쳐주던 루쉰의 집 달머슴 아들이던 윤토는 가렴주구하는 지방 토호들의 세금과 끝 없는 노동에 시달려 깊은 주름에 얼굴이 상하고 늙었다.

루쉰의 커다란 집을 이사하느라 내놓은 물건과 집기들은 그를 업어주기도 하고 귀여워해주던 이웃들이 얻어 갈 공짜 물건 목록에 오르고 마침내 어머니와 조카를 싣고 떠나는 배 위에는 세 사람의 몸뚱어리와 약간의 짐만 올라 있는 듯하다.

향로와 촛대를 가져가는 윤토를 미신을 믿는다고 속으로 비웃었던 루쉰이지만 자신이 품었던 희망 또한 옛 친구 윤토의 미신만큼이나 덧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토가 데리고 온 가녀린 아들 수생을 그리워하며 다시 고향에 올 날을 아쉬움 속에 고대하는 조카 굉아를 보며 루쉰은 후대의 삶이 자신들 세대처럼 장벽에 가려진 채 희망과 불안을 번갈아오가는 고달픈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유명한 루쉰의 말이 마지막에 나온다.

희망은 없다고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다만 사람들이길을 걷기 시작하면 길이 생겨나는 것처럼, 희망도 그러한 것이리라.

지금 세태에서 그저 희망이란 단어에는 촌스러움마저 달려 있는 것 같다. 너무 빨리 새것이 나오고 너무 빨리 사라져간다. 그런데 상상력은 과잉이지만 회고하는 힘은 점점 약해져간다는 생각도 든다. 루쉰처럼 기억 속의 고향과 현실 속의 고향이라는 벽 사이에서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들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들이 과연 우리에겐 남아 있을까?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 함몰되어 수많은 공허함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삶이 불안하다고 해서 막연한 미래에 빠져들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잘 보존해야 한다.

정을 나누었던 사람들, 즐겁고 아팠던 순간들, 그때 꿈 꾸었던 것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고통 속에 단단해진 희망의 꿈을 안고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

[201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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