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을 읽고-운과 맞서 싸우는 인간

군주가 공화국을 다스리는 원칙에 대해 마키아벨리가 정리한 내용을 읽다 보면 정치인은 일종의 배우 같은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왜 그럴까 따져보면, 소박한 삶을 허락받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 났을 뿐 아니라, 타인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매우 부지런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자신만을 위해, 자기의 욕구만을 채우기 위해 살 수는 없으며, 군주의 목숨은 타인에게 달려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하고 이탈리아의 통일을 실현하고자 당시 권위와 신망을 얻고 있던 메디치 가문에게 이 책을 바치고,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발판을 얻고자 한 것 같다. 그래서 공화국의 이상적 형태를 제시하기 위해 옛 이스라엘왕국의 지도자 모세부터 키루스, 로마의 건국 왕 로물루스와 그 이후의 뛰어난 군주들 및 자기 시대의 프랑스 왕들과 스페인 왕들의 경험을 분석하고 종합한다. 그리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자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던 체사레 보르자를 자신의 ‘군주론’의 이상적 인물로 제시한다. 교권 왕국의 이익을 위해 탁월한 행정력을 발휘했던 아버지의 업적을 배경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동맹을 성사시키고 여러 도시를 정복하였으며, 자신의 용병들의 반란에 직면해서도 냉혹한 지도력으로 역경을 헤쳐나간 체사레 보르자를 연구한 마키아벨리는, 끝없는 외침과 내분에 시달리는 이탈리아를 새로운 공화국으로 탈바꿈시키고자 이 저작에 온 정열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데서 법률, 국방, 외교, 통치자의 리더십이 과연 어떻게 맞물려 질서를 갖춰야 하는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고전을 한 번은 읽어봐야 할 것이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문체는 현학적이거나 화려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강인한 논리와 역사적 실례들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은 ‘운과 인간의 본성’이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마키아벨리 자신의 절실한 경험과 결단이 녹아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생명력이 아닐까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좋은 법률이 필요하지만 사실 좋은 법률은 훌륭한 군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내란과 전쟁에 시달려온 조국의 경험과 옛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적 사례를 통해 깨닫고,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훌륭한 병력을 확보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결국 마키아벨리는 당시의 군주국은 로마 제국처럼 정복된 영토의 통치와 행정 안에 확고히 자리 잡은 상비군이 없는데다가, 병사들보다는 인민의 권력이 더 커졌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옛 군주국과 달리 새로이 탄생할 공화국의 군주는 인민을 가장 두려워해야 하며, 적어도 미움과 경멸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이것은 군주에게 필요한 덕성의 목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발전과 시대의 조건이 정말로 그 점을 요구한다는 견해에서 내려지는 결론이다.

  바로 인민의 본성과 권력의 의미에 천착한 마키아벨리로서는 군주와 인민의 우정에 바탕을 둔 현명한 통치의 요건을 정리하면서, 귀족이나 병사들과 달리 인민은 자기 재산이 침해당하지 않고 억압받지만 않는다면 군주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복잡한 정치 영역에서 이러한 철칙을 관철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주가 지닌 타고난 인간적 성격과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특성의 조화와 충돌 속에서, 운에 어떻게 지배되고 또한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논하고 있다. 이 심각한 문제를 두고 마키아벨리는 “나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기 위해, 운은 우리가 하는 일의 절반을 주재하고 다른 절반 정도는 자신이 통제하도록 남겨둔다는 것이 아마 진실일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한다. 둑과 제방을 만들어 강물이 범람할 때 그 기세를 덜 사납고 덜 위험하게 할 수 있듯이, 운도 저항할 힘을 제대로 준비해 놓아야 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운은 가변적이지만 인간의 처신은 완고하기 때문에 운과 정책이 일치하는 한 인간은 흥하고, 충돌하면 망한다고 결론짓는다. 마침내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은 여자이고, 그녀가 복종적이어야 한다면 그녀를 때리고 강압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그것은 냉정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 자주 복종한다는 것이다. 운은 여자이기 때문에 항상 젊은 남자들을 좋아하니, 그들은 덜 신중하고 더 열렬하기 때문이요, 그리고 더 대담하게 그녀를 부리기 때문이다.

  한번은 누군가에게 ‘본능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면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운의 사나운 지배력과 본능의 위력은 상통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본능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인간은 항상 준비하고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일까? 만약 본능은 덜 신중하고 더 열렬하게 행동하는 대담한 남자들을 좋아한다면, 과연 집단적 인간 본능의 힘에 맞서는 과감한 행동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마키아벨리가 정치를 인간에 대한 운의 지배에 맞서는 과감하고 능동적인 행동 계획이요 실천이라고 이해했다면, 인간으로서는 통제하고 다룰 수 없는 본능의 위력에 맞서 싸우는 적극적인 계획과 행동 또한 정치와 맞닿아 있다고 이해해도 될까? 잠시 약간의 비약을 통해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2009.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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