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물리학과 만나 이론을 세워가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그와 주변 인물들이 벌이는 대화이다. 그러나 그 대화 전반을 통과하는 핵심이 자리 잡고 있다. 자연현상과 언어, 물질에 대한 의식의 관계, 연구자는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발언하고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반영하고 있는 그의 사상이다.
1. 자연과 언어와 연구자
요즘처럼 다양한 매체언어가 발달한 시기에 ‘언어의 한계’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쉽고 편한 방법으로 그 한계를 비껴가는 소통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이젠베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청년기에 ‘원자’에 대한 물음을 두고 친구들과 대화를 거친 끝에, 이 원자는 ‘표상도 사물도 아닌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닿는다. 이는 언젠가 그가 읽었던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들게 된 생각, 곧 물질의 최소 단위는 결국 수학적 형식에 부딪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상상과 관계를 맺는다.
그의 학문 세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스승이자, 양차 대전 이후 독일 중심의 양자역학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 동료 닐스 보어 ― 그는 코펜하겐 대학, 그러니까 덴마크 인으로서 독일 나치의 위험성을 예감하고 있었다 ― 의 언급으로 하나의 방향을 얻는 원자에 관한 이해는 이렇다. 당시 원자는 전자의 궤도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실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지만, 보어는 이런 이해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를 원자의 상(像)에 대한 표상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질의 안정성이 원자에서 비롯되기는 하나 이는 이론적 계산과 증명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며, 당시까지 통용되던 뉴턴 이후의 고전물리학의 직관적 언어를 통해 표현할 수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청중의 의식에 상을 불러일으켜 마음의 결합을 가져오는 시(詩)의 언어와도 상통하고,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해’라는 말의 의미를 배운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명석한 동료들과 함께 엄밀한 관찰과 가설의 실험적 증명으로 원자물리학의 이해에서 발생하는 난점을 해소하고자 도전하지만, 아인슈타인과 만남을 통해 관찰과 현상, 자연법칙에 대한 과학자의 태도를 다시금 재확인한다. 곧 사람이 새로운 자연법칙을 정식화하려면 종전의 자연법칙에 의지하여 관찰한 이야기를 허용할 수 있어야 하며, 여기서 올바른 개념 구성의 요건인 ‘단순성’은 주관과 객관의 측면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연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자연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만이 자연과학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충고는, 이론적 계산이나 증명이 아닌 고전물리학의 개념과 언어를 통해 원자의 직관적 상에 대한 표상을 찾아내야 한다는 보어의 견해와도 통하는 걸로 여겨진다.
이로써 하이젠베르크는 현상이 지닌 ‘불연속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중요하며, 이 불연속성이 실제적인 사실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따라서 그의 이론으로 널리 알려진 ‘불확정성의 원리’의 단초는 이러한 현상의 불연속성이 빚어내는 부정확도를 작게 하여, 수학적으로 그런 대략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의 스승 보어 또한 상보성 원리, 곧 한 사건을 두 가지 다른 관찰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태를 서술하고 이를 병행시켜 하나의 현상이 지닌 직관적 내용이 풀어진다고 보았다. 보어는 자연과학의 과제는 자연에 대해 무엇인가를 진술하려고 할 때 반드시 수학적 언어에서 일반적 언어로 이행하는 것이 과제인데, 이 언어는 개별 인간 자체가 발달시키지 않고 개별 인간들 사이에서 발달한 능력이어서, 본능에서는 동물보다 열등한 인간이 자신의 결점을 공간과 시간의 광범위한 영역을 통제하도록 하는 ‘융통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언어로 이루어지는 논의의 여러 상이한 가능성에서는, 우리와는 ‘완전히 독립된 실제에 속하는 어떤 기본적 형식’이 깔려 있고 이 형식이 언어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란 실제와 결합하여 가능한 한 많은 낙관론과 설득력을 가지고 하나의 像의 실제적인 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지, 언어 그 자체가 사물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인간 경험 너머에 있는 원자와 그 표상의 관계, 자연과학의 과제를 두고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양자물리학의 이론 세계를 확립할 수 있는 자극을 얻는다.
2. 실용주의와 실증주의 비판
앞서 이야기했듯, 하이젠베르크는 불연속성이 현상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대체로 실용주의자들은 ‘영속적 진보’라는 표상을 통해 사실을 설명하고 기존의 이론들을 ‘개량’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판단규준으로서 공리체계가 되는 뉴턴의 역학, 열의 통계학 이론, 맥스웰의 전자기 역할을 포함한 특수상대성이론, 새로 성립된 양자역학 네 가지는, 이 개념들로 서술될 수 있는 경험 영역에 우리가 머무는 한, 그 진술이 정확한 공리로 정식화되는 체계를 갖는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은 아직 그 공리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많은 미해결의 과제를 허용하고 있다.
실용주의자들은 뉴턴의 역학에서 상대성원리·양자역학으로 이동할 경우 새로운 ‘보조항’을 첨가하여 이전에 등한시했던 영향을 보완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은 뉴턴 역학의 절대적 타당성으로 도저히 꿰뚫을 수 없는 ‘경험 영역’으로서 새로운 개념구조가 필요했기에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탄생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해 없이 막연한 연속성에 기대면 과학의 엄정성이 박탈되고 전체적 자연 현상의 ‘간단하고도 위대한 연관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많은 고난을 한꺼번에 해결하도록 강요당하기에, 자연을 그 본연의 형태대로 형성시키고 우리 영혼의 구조, 곧 사고능력의 구조를 책임지는 힘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어려움이라도 제대로 해결되어야, 반드시 간명하고 위대한 연관성에 봉착하여 다른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실증주의자가 지닌 이상을 반박한다. 그들은 자연과학의 언어로 자연 현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는 이상에 사로잡히지만, 실험 결과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이미 그 통용 범위를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부수적 의미를 달고 다닌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따라서 그저 ‘사실’을 서술하기만 하면 어떤 이론도 받아들이며, 양자역학이 추구해 온 상보성, 확률의 간섭, 불확정성 관계, 주체와 객체의 절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모든 개념의 명백성을 맹신하는 실증주의가 양자역학을 이해할 리 만무하다.
양자역학은 상보적 개념인 ‘파동’과 ‘입자’로써 자연을 이중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양자이론은, 어떤 사실의 관련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표현할 때는 추상과 비유를 사용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예라는 것이 닐스 보어의 견해이다.
3. 자연법칙의 이해와 위대한 연관성-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는 ‘원자’라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큰 것으로 나아간 사람이었다. 그가 새파란 젊은이 시기에 생각했던 플라톤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정다각형 모델은, 오랜 연구의 결실로서 하이젠베르크가 결론을 내린 소립자의 대칭성이 방사성 스펙트럼에서 교란되어 나타날 때, 그것이 자연법칙의 대칭성에 관한 단순한 표현으로서 갖는 개연성과 관련을 맺게 해준다. 『티마이오스』의 정다각형은 생물학에서 하나의 기본구조로서 원형생물로 간주되는 ‘핵산’과 비교될 수 있는데, 이 핵산이 물질의 원형이요 생물의 이념으로서 넓은 범위에 걸쳐 모든 사건을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소립자가 충격을 통해 하나 또는 몇 개의 특성을 지닌 어떤 대칭성을 이룰 때, 이는 수학적 형식으로 표현되고 이 형식은 결국 소립자라는 객체에 상응하는 이념일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물질의 최소 단위가 수학적 언어와 일상 언어의 철학적 통찰을 통해 이러한 객체의 이념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그의 결론과 방법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책 전반을 통해서 볼 때, 이는 그가 정치적 격변과 혁명의 시기에 과학자로서 자기 본분을 사수한 태도에서 나온다. 나치즘의 질서가 세계 전체를 뒤흔들 위험에서 원자물리학이 무기 개발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력한 그의 고뇌어린 저항은 ― 이는 뜻밖에도 미국에서 활약한 원자물리학자들에 의해 실현되지만 ― 과학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좁고 윤곽이 확실한 문제 해결에 노력할 때, 곧 가능한 한 작은 범위에서 변화시키는 노력이 실현될 때라야 이후 모든 생활양식도 자연히 변한다는 그의 사상에서 나온다. 좁고 확실한 윤곽에 해당하는 부분에 충실하여 커다란 연관성을 깊이 생각하는 데서 진정한 명석함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확정성의 원리’를 떠받치는 그의 기본적인 윤리이자 사상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래서 그는 전문가의 정체성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전문가란 그가 전문으로 하고 있는 분야에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큼직한 몇몇의 오류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다.”
[2008.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