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수고] 1권, <서설> 중 몇 가지 주제 관련 요약

한국어판, 이상훈 역, 1986(제1판), 2006(제5판), 거름 [영문판 원본: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of Antonio Gramsci,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71; 1978), translated by Quintin Hoare, Geoffrey Nowell Smith]

1. 그람시의 지적 배경과 출발점

그람시가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검거로 감옥에 갇혀 지낸 시기에 쓴 원고들이 이른바 <옥중수고(Quaderni del carcere)>인데 그람시는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를 가리켜 ‘실천철학(filosofia della praxis; philosophy of praxis)’이라는 우회적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토리노 대학 시절 마르크스주의 강의에서 처음으로 이 용어를 접했고, 이탈리아에 그 용어를 처음 도입한 것은 안토니오 라브리올라(Antonio Labriola)라고 한다. 라브리올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진수를 이론적 활동과 실천적 활동 사이의 독특한 연관에서 찾았고 철학과 역사의 통일을 주장했으며, 의식에 대한 관계의 우위를 주장함으로써 자신과 헤겔학파를 구분지었다.

라브리올라가 죽은 후 로돌포 몬돌포(Rodolfo Mondolfo)가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지도적 철학자가 된다. 그는 ‘철학적’ 마르크스와 ‘경험주의적인’ 엥겔스를 연결하고자 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 공헌했다. 그람시가 ‘실천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 그람시도 사상이 성숙해가면서 마르크스 저작 속의 유물론적 토대를 별달리 주목하지 않은 점에서는 몬돌포와 일치한다. 그런데 그람시는 이런 부분을 형이상학의 배제와 ‘내재주의(immanentism)’에 대한 강조로 대체했다고 한다. 그람시는 라브리올라를 관념론자로 단죄하는 마르크스주의자에도 반대하면서 라브리올라의 본질적 마르크스주의를 거듭 천명하고자 했다. 몬돌포는 마르크스 시대의 문화까지 소급하여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했는데, 그람시는 마르크스가 무엇을 읽고 무엇에 몰두했으며 생애 각 기간에 무엇을 거부했던가 하는 식의 개인적인 철학적 문화와 마르크스 자신의 독자적 철학은 구별하고자 했다.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라브리올라의 제자로서 1895~1900년의 짧은 시기 동안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사적(史的) 질문과 탐구를 위한 규범’으로서만 마르크스주의의 유용성을 평가하고 “이탈리아에서 이론적 마르크스주의는 죽었다”고 선포했다. 그는 파시스트 등장 이전 시기의 젊은 좌익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실증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와 세속주의로 반향을 일으켰으나, 1920년대 초 무솔리니를 지지한 데서 볼 수 있듯이, ‘도덕적 갱신’을 위험스러울 만큼 강조했다고 한다. 한편 크로체는 프랑스 생디칼리즘의 이론가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 1847~1922)과의 지속적 교류로 인해 좌파 철학의 기수라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훗날 그람시는 자기비판적 서술을 통해 젊은 학창 시절에 자신이 크로체적 경향을 띠었다고 했다. 그람시는 크로체 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를 엄격히 비판하는 글을 쓰고 이데올로기로서만이 아닌 특정 철학적 체계로서의 크로체주의와 투쟁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람시는 크로체가 대립물의 투쟁이라는 역사운동을 단순히 ‘차이물의 변증법(dialectic of distincts)’이라는 개념적 변증법으로 환원시킨 점을 비판한다. 그람시에 따르면 그 같은 구도는 지식과 존재의 통일(계급사회에서는 불가능)이 궁극적으로 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계급 투쟁으로 규정되는 역사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성격을 설명해줄 수 없다고 비판한다. 실제 역사를 가상적 개념의 천상계로 추상하는 것은 크로체 철학에서는 정치학의 근본적인 부정을 동반했다. 크로체의 독특한 ‘범주들’에 따르면, 미학·경제학·논리학·윤리학이라는 네 학문의 존재만이 허용되고 각각 미(美)·유용성·진(眞)·선(善)의 탐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정치학은 단순한 혼합물로서 어떤 철학적 가치도 지니지 않은 단순한 ‘정열’로 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반면에 그람시 사상에서 정치란 철학적으로 볼 때 인간 활동의 요체이며, 개별 의식의 모든 형태의 사회적·자연적 세계와 접촉을 맺는 수단으로 설명된다.

옥중의 그람시에게는 전쟁과 파시즘을 거치며 나타나는 이탈리아의 복잡하고 혼돈된 상황, 이탈리아 지식인이 보여준 문제들, 그들의 지방주의와 세계주의, 그들이 교회와 국가의 권력구조에서 수행한 역할들이 주된 고찰 대상이었다. 그람시의 비판은 성장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힘과 관련하여 어떻게 하면 지식인이 ‘민족적·민중적’ 의식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관점에서 이탈리아 인텔리겐치아의 허약성을 현실성 있게 평가하는 데서 출발했다.

2. 그람시가 내세운 전략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부터 PSI(이탈리아 사회당) 내 코뮤니스트 동료들인 타스카, 톨리아티, 테라치니와 함께 사회주의 문화평론지 성격의 주간지인 «오르디네 누오보(Ordine Nuovo): 신질서» 창간을 계획했던 그람시는 소비에트의 이탈리아적 등가물로서 ‘공장평의회’를 구상했다. 러시아의 1917년 10월 혁명과 세계대전의 충격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눈앞에 가져다놓았고, 그람시는 공장평의회를 기초로 지역 소비에트를 수립하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맹아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오르디네 누오보» 그룹은 이탈리아 사회당이 당시 토리노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거센 파업과 공장 점거와 무장 투쟁 요구에 제때 응답하지 못한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와 노선 투쟁 속에서, 마침내 1921년 창당된 PCI(이탈리아 공산당)의 주요 지도자들로 활동했다.

PCI 창당 전후로 그람시가 유지했던 관심과 한결 같은 입장은 이탈리아 상황에 진정으로 적합한 당 활동과 정치적 공작을 수행함으로써 이탈리아 혁명의 미래를 방어해야 한다는 것, 전래의 사회주의도 아니요 그와의 타협물도 아닌 이념적 중심부를 가져야 한다는 것, 혁명 정치는 역사에 적극적·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하며, 정확하고 옳은 입장이 증명될 때까지, 역사 과정이 스스로 창출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새로운 전략의 주요 요소로서 PCI의 진정한 대중적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제시한 주요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즉 소비에트 권력을 향한 매개로서 노동자·농민 연방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의 집중 선전, 북부 노동자와 남부 농민의 견고한 동맹을 위해 이른바 노동귀족, 즉 개량주의와 투쟁한다. 농민 대중이 집중된 남부에서 무장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방법 연구, 내부 분열을 지양하기 위한 집중적인 당 내 정치 프로그램 개발 등이었다. 그람시에게 당이란 혁명적 대중의 자발적 운동과, 조직·지도하고자 하는 중앙의 의지가 수렴되어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였다.

3. 파시즘에 대한 그람시의 판단

그람시는 파시즘과 관련해서 파시스트 블록에서 남부의 중간층은 경제적 모순으로 떨어져 나올 것이며, 이러한 전망에서 북부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남부의 농민 사이에 동맹을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확산되던 당시에는 새롭고 독특한 형태의 부르주아 반동 지배인 파시즘의 모든 가능성을 다 내다보기에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람시는 파시즘이 붕괴되면 초기에는 사회민주주의적 조직이 힘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재적으로 불안정한 단기적 국면에 이어 내전의 시기가 따를 것이라고 보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람시와 PCI의 지도자들은 파시스트 정권의 힘과 내적 발전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결국 반(半)합법 상태로 남아 있던 PCI는 상황 판단의 실패로 인해 좌경 선회 후 주요 간부들이 제명되거나 이탈리아에 들어왔다가 검거되었다.

그람시가 옥중에서 토론을 통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이탈리아 파시즘은 부르주아 혁명의 왜곡된 형태로서 1차 대전 이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각각 너무 분열되어서 어느 쪽도 서로 굴복시킬 수 없는 ‘힘의 균형’ 상태가 그 직접적 배경이며, 농민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확립이 절대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4. PCI 다른 지도자와 그람시의 차이

이 책 영문판을 편집하고 번역한 <서설>의 저자들은 그람시는 레닌 이래로 지지자와 반대자들로부터 일방적·당파적 해석으로 가장 많이 시달린 사상가로서 오늘날 그의 «옥중수고»의 복합성을 자세하고 진지하게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 PCI의 3개 정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타스카(PCI 우파), 보르디가(PCI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며 경직된 입장을 고수했던 다수파의 지도자), 그람시였다고 할 수 있다. 보르디가는 ‘순수한’ 원칙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엘리트 당으로서 PCI를 끌고 가려 했고, 타스카(그람시가 토리노에 와서 대학에 다니고 정치에 입문할 당시의 첫 정치적 동료이자 친구)는 레닌주의적 정당과 2차 인터내셔널 정당 간의 질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전위정당과 대중의 자발성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자율적 계급 조직의 창출에 초점을 두었으며, «오르디네 누오보»에서 제시한 노동자·농민연방공화국, 공장평의회의 개념, 계급 유기체 속에서 권력 장악과 혁명 투쟁을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전위정당과의 변증법적 연관 속에서 바로 그러한 계급 조직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혁명가 그람시의 인생은 온갖 병마와 싸워야 했다. 육체적·정신적 고통, 정치적 분열과 탄압, 옥중에서의 극도의 고립감과 싸우면서도 감옥에서 파시즘 정권과 투쟁해야 했던 기록이 말해주듯이, 정치와 혁명이란 것에 수반되는 고통의 의미를 구현한 인물로서 당시 20세기 초반의 역사를 증언한 사례이다. 그의 정치적 경험은 토리노에서의 노동자들과의 투쟁, 이탈리아 공산당의 형성, 파시즘의 대두와 강화, PCI 내부와 코민테른에서 벌어진 전략적 논쟁 등의 배경을 통해 이해되어야 할 것이며, 그람시가 마지막 감옥에서 죽기까지 7년 동안 공개적으로 쓰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라고 한다.

질문들>

1) 라브리올라가 마르크스주의의 진수로 파악했다는 이론과 실천의 독특한 연관, 철학과 역사의 통일, 의식에 대한 관계의 우위, 그람시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토대보다는 형이상학의 배제와 내재주의를 강조했다는 점, 크로체가 마르크스주의를 사적(史的) 탐구의 단순 규범으로 격하시키고 차이물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의 가상적 세계에 비해 정치학을 부정했던 것, 크로체가 도덕적 갱신을 강조하고 한때 무솔리니를 지지했다가도 조르주 소렐과 계속 교류하면서 좌파 철학의 기수라는 환상을 유지한 것, 그리고 그람시가 당시 지식인 계층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크로체 철학에 대해 투쟁했던 점들.

2) 그람시의 정치와 혁명 활동은 이탈리아 인텔리겐치아의 객관적 허약성을 평가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 의미와 시사점.

3) 정확하고 옳은 입장이 증명되고 역사 과정이 스스로 창출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혁명 정치가 아니라는 것, 이탈리아 혁명의 미래를 방어할 이념의 중심부.

4) 그람시와 PCI 다수파이자 좌파의 거두 보르디가 등 다수 지도자들은 PCI 우파의 대표자 타스카에 비해 왜 파시즘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나?

5) 그람시의 대중의 자발성과 조직·지도하는 중앙조직으로서의 전위정당의 관계,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정치정당의 존재 방식. 왜 그토록 그람시는 정당의 역할, 공장평의회의 설립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투쟁하다가 마침내 파시스트의 감옥에서 고통 속에 죽어가야 했나? 혁명가요 사상가로서 그의 인생의 역사적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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